사람이 말을 할수가 있게 된 이래로 전부다나 아니면 일부라도 좀 늙은것들은 항상 주둥이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말세로구나 말세야 한다


지난밤에 느닷없이 터진 고양이폭행녀라는 사건에 놀라서 뉴스를 봤는데, 딸려나온 건물사진이 낮익어서 뭔가 싶더니만 우리집이 들어있는 아파트현관부터 걸어서 2분거리였다

나는 딱히 고양이에 대해 깊은 애호나 애착을 느끼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때때로 의식하지 않고서도 그냥 막 느껴져오는 그녀석들의 궁상맞으며 허허롭고 게으른, 나랑 비슷하다고 억지를 부리고 싶을정도의 표정들을 보면서 상당히 기분이 좋아지는 편이다

그래서 본래 고양이가 사람과 정말 많이 닮았기 때문에 나까지 그러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성격이 궁금해진건 어떻게든 나부터 충분히 이해하도록 설명할 수 있고 싶어해서, 예전에 궁리를 해보니 대략 결론이 이랬었다

적어도 나한테는 계통이 더 인접한 원숭이종류보다 고양이가 사람과 더 많이 비슷하고, 역사적으로든 습성으로든 더 많이 친한 개보다도 더 뚜렷하게 알아볼 수 있게 생겨먹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은비라는 하얀 애기가 처참하게 죽은 사건도 지리적으로 바로 앞에서 일어난 일이라 그런건지 좀더 유난히 신경이 쓰이고 있다

지금까지 고양이와 같이 살아본적이 한번도 없고 친한 누구네 집에서 어울려 놀아본 서너번이 고양이에 대한 경험의 전부이지만, 일반적으로 가까운 어디에서 사람이 그렇게 죽은것 못지않게 슬프고 분하다

이런걸 뭐랄까 공감능력이라고 치면 맞나 몰라


그래서 느닷없이, 누구누구들이 체감하는 말세의 실마리를 대중의 공감능력이 실종된데에서 찾아보면 그럴듯하게 말이 되는 주장을 세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다만 우리의 현재가 말세라는 개념에 유난하게 육박해가는 때라고 하진 못하리라는 단서는 달아둔다

늙은것들이 기억하는 아름다운 옛날은, 아마 걔네가 그때 많이 어리고 시야가 좁아서 겪은 착각으로 인한 허구다

왜냐하면,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중 일부인 고양이를 해치는 여자나 딸만한 아이를 강간하고 죽이는 남자나 아직 사고를 친건 아니지만 잠재적으로 별로 다를게 없어 계기만 걸리면 비슷한짓을 저질러버릴 여지가 충분한 수많은 다른 일반들이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의 공감능력을 거세해가는 삶으로 접어들곤 하는 이유 때문이다

왜들 그랬을까

아마, 아프고싶지 않아서인건 아니었을까?

그건그렇고 다들 알고있을 싸이코패스가 그러한 공감불구자의 끝에 달한 이상적인 모델이다


비약의 나머지 조각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옛날옛적에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아팠다

남아있는 역사의 기억에 그 증거가 그대로 그려져 있다

무려 왕의 아들로 태어난 붓다는 그 오지랍넓은 공감능력만큼은 차마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대신 아픔의 작용보다 더 빨리 더 깊이 더 멀리 넘겨짚는 능력으로써 안아플 수 있는 해결방법을 찾고자 깊이 고민했었다(그래서 불교는 종교가 아니기도 하다. 앗참 그리고 굴레를 벗는건 결국 실패인듯)

그리고 같은집에 얹혀살며 지르는거 좋아하고 물에 들어가기 싫어하며 성격이 소박한 왕자의 친구 세이예수는, 어쩌다가 아픔의 총합을 줄여보겠다고 안맞은 다른편의 뺨까지 내어주자는 제안을 했다더라(그런데 로마제국덕에 기독교는 종교의 한계에서 못벗어났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것의 근본원인까지 따져올라가서 전부 다 쌩까버리자는 과감한 발상과 그 방법에 대해 논하며 실천했던 노자와 찌끄레기들도 있었고, 아픔인지 똥인지 된장인지 판단치 아니한 채 전부 다 품어놓고 함께 마시며 사랑해버리고 만 청춘같은 주책 하피즈, 극도로 깔끔하게 나쁜것과 나쁜것의 원인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려다가 그건 못하고서 엉뚱하게 글재주만 엄청나게 늘어버린 스콧 니어링, '어이쿠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거였구나'라면서 다각도의 면밀한 분해와 연구작업을 통해 공략방법을 모색하는 근대이후의 이른바 철학자들, 알고 일부러 그런건지 찌질해서 그런건지 아픔에 대해 우리가 취하는 반응의 역동성을 노린마냥 거기에 정통으로 들이받아 박살난 후에 잊혀지지 않을 오만가지 걸작들을 싸질르고 간 기타등등의 천재 예술가들이 있다

뚜렷하게 나름의 대응을 찾아 실행했었으며 나한테까지 알려져 있는것이 이정도가 되고 더 뒤지면 당연히 더 나오겠지

한마디로, 어떻게 결과가 나름 생산적이었던 이와같은 사람들과 지금 우리의 주변에서 자기도 어떤지 모른 채 일상을 암약하다가 순서가 돌아오면 누굴 죽이거나 무언가를 망치는데 성공하여 다른 덜 삭막한 자의식들의 공감능력을 경악시키는 짐승들이, 근본적으론 같은 존재라는 위험스러운 일단의 결론되겠다

아니 그렇게 하도록 만든 세상이 그때나 지금이나 같았다고..젠장 무슨소리야 이거


그렇다면 공감력은 무엇일까?

책읽기 좋아하고 부지런한 사람이라면 단어만이라도 접했을 거울뉴런이라는걸 예로 들면 아마 내용전달이 아주 쉬울것 같다

거울뉴런은, 사람이 무언가를 느낌이 마치 티없이 맑은 거울에 비추이듯 정확하고 절절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보다 효율적이고 깊은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져 여러 개체들이 모여서 집단생존을 택한 우리의 선조종족이 더 잘 살아남을 수 있게 해줬다고 어디서 나오드라

이게 제대로 작동하는 사람이라면, 타인이 겪는 무언가에 대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생생하고 강력한 일체감을 느끼게 된다

오래 떨어져지낸 동생이나 얼마전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연상해서든 그런게 없이 직관적으로 그냥 뭉클해져서든 예를 들어 몇십년만에 만난 이산가족상봉의 장면을 보면서 끌어안는 그들 가족처럼 눈물짓는 것, 아끼는 친구가 돈 많이주는좋은 회사에 성공적으로 입사한 이야기를 듣고 덩달아 나도 기쁜 것, 누군가가 부당한 대접을 받은 상황에서 피해자의 편에 붙어 논리적으로도 나쁜놈한테 분노를 표하는 것등이 모두 이놈으로 인한 효과이다

거기에 더해서, 느낌의 작용이 조금 차원을 높이면 분명히 사실이 아님을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막장드라마 같은거랑 가사가 애매하거나 없기까지도 하는 음악과 심지어 실존할 수 없는 동세에 대한 조형과 모사를 바라보면서도 그걸 꾸민이가 표현하고 싶었거나 겪고있었을 어떤 마음의 움직임을 감지해서 공명할 수 있게도 된다


그러거나 말거나 거기까지 갈것도 없이 요게 안되는 사회에서는 당연스럽게 아주 많은 부조리가 생긴다

내가 이 글을 쓰고싶도록 만든 이유가 여기에 있지

자기는 안아프려고, 교묘하게 아픔을 강요하는 세상을 외면했기 때문에 잃어버린 모든 개인들의 실종된 공감능력이 어우러져 도리어 우리를 위협하는 아픔이 더 무시무시하게 강화되는 뜻밖의 진행이다

그리고 그때문에 공감의 통로를 재차 단단히 틀어막아 단속하게 된 결과 우리가 일반적으로 더 비정해지고 독해지고 있다는 평가가 맞는 말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고,


아래는 내가 부조리라고 한것이 일어나는 원인과 진행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이다

생명개체는 열린 계이다

에너지 내지는 그것을 품은 물질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나가는걸 통해 유지된다

나가는건 내 뜻대로 막을수가 없으니 놔두고 대신 그만큼이상을 갖고와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죽으니까

누가 그랬더라 생명의 본질이 약탈이라고

남(다른 생명)이 모아놓은걸 뺏어먹어야 존속이 가능해진다

살아있는 닭도 좋아하지만 엄마가 수화기를 목에 끼고 뭐먹을래? 물어보면 양념반후라이드반무많이라고 대답했다는 어느 훈훈한 일화가 그것을 증명한다

졸라 어려운 단어를 이용해서 표현하자면 이러한 실존적 요구사항이 있었고, 만물의 영장이니 유일하게 은총받은 신의 대리자라느니 갖가지 긍지높은 자뻑이 무색하게 우리 몸뚱이도 먹고싸야지 안망가진다

해서, 요것을 매크로시킨 결과 욕심이라는 개념이 이름을 얻었다

모자란 어떤것이 찰때까지 더하고 싶어하며, 마땅치 않은 또 어떤건 흡족해질만큼 바꿔놓아야 풀리는 마음

사람에게 고유한 욕심은 그대로 놔두면 괴물처럼 부풀어올라 다 삼켜버리거나 운이 안도와줘서 삼키지 못할 상황에 처하면 자폭하는 습성이 있다

제한이 있는 삶을 통해 타의적으로 곱게 늙은 망구망태와, 쉽게 그냥 성자나 영적인 지도자라고 불려버리는 사람들중에 똑바른 극소수가 사적으로는 가장 주의해서 다스렸었고 우리에게도 조심하라면서 가장 강조한 대목에 꼭 들어가있는것도 바로 욕심이다

그들의 삶과 말이 전적으로 아름다운건, 아마도 자기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할, 제일 우선으로 욕심같은 것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하는 방법을 알아내서 잘 실천했고 결과가 주변의 타인들에게까지 이로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보상이 있다

돈주고 재화를 구하거나 물건으로 물건을 사는건 나쁜게 아니다

그게 아니라, 이것에서 얻지 못해버린 만족을 다른 저것을 통해서 대신 채우려는, 거의 마지막 시점에서의 발악에 대한 이야기이다

남성 연쇄살인범의 심리적인 동기가 모두 다 성적인 불만족(발기불능, 외모가 못나서, 돈이 모자라서, 최초의 여성인 엄마의 경험이 없어서, 그 경험이 있긴 했는데 양육과정중에 자연스럽게 끝맺어지지 않아서)에서 비롯된다는 학설이 있는데, 나는 그보다 여자쪽의 동기가 더 궁금할 뿐이고 좌우간 아마 정확할거다

본래 있었던 감각의 기술을 벽으로 막아서 스스로와 세상에 폐를 끼치는것과는 반대로, 자연히 가능해야 마땅한 분출과 소통의 한 통로가 가로막혀져서 생긴 울화의 결과이다

그러나 필자는 어떻게 한번 엮어보려고 애를 쓰는 중이다

아무튼 위의 예는 대표적이며 가장 극단에 가있는 보상의 유형일 뿐이지만, 그밖의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서도 같은 메카니즘을 엿볼 수 있었다

옛날에 사랑했던 사람과 비슷하다는, 심지어 부모중 이성과 닮았다는 이유로 누굴 좋아하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아주 흔하잖아

죽이지만 않았다 뿐이지, 단언하건대 그의 내면에서 일어나 제자리에서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움직임은 거의 똑같다

이해를 위해 그런식으로 집착하는 사람이 거절당하고 좌절한 다음 고려할 수 있는 미래중 가장 못난 선택이 바로 상대방을 죽여버리는 짓이라는 부분까지만 덧붙이겠다

참고로 얼마전에 내가 아주 집중해서 봤던 공기인형이라는 영화가 이것을 다룬 최근의 가장 두드러진 매체였다


거기에 더하여, 전혀 다르면서도 같은 단어로 엮어낼 수 있는 추가의 상황이 또 있다

우리가 기꺼이 저지를 모든 업보의 동기를 유발시키는 바로 그 보상

내가 이렇게나 정성을 들였으니 그에게서 분명 합당한 만큼의 좋은 대답이 돌아오겠지 하는 헛물켜기와, 니가 좋다면 나도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충만한 허무를 감내토록 만드는 그런 보상말이다

그리고 기분이 좋아지는 효과를 위해 야하고 멋진 이성(의 몸)을 훔쳐보다가 더 좋아지기 위해 그 이후의 더한것을 강요함도 마찬가지로 보상의 원리에 굴복해버린자의 모습이며, 혼자서 당해내지 못한 내면의 격렬하고 나쁜 감정을 풀어내기 위해 다른 누구나 무엇을 아프게 하는것도 똑같을 것이다


분명히 사람말고 다른 동물의 필요한 만큼에서 딱 멈추는 생존과 번식의 욕구에서 우리들이 즐겨 저지르는 욕심의 근원을 찾을수가 있을텐데 어쩌다가 이지경으로 막나가게 된것인지는 상상이 안된다

하여튼 또 꼬리를 붙잡고 생각해보니 용맹정진으로 맞싸워 이겨버리는 어려운방법 말고 삶을 영위하며 계속해서 이 욕심이란놈이 나와 남을 향해 해를 끼치는걸 막을 좋은 방법이 바로 공감능력의 개발이라는 결론까지 지어내버렸다(드디어 나왔다 공감 이제겨우 본론이구나 어휴 힘들어)

원하는 무엇을 가정한 다음 그것에 대해서 취할 수 있는 태도를 지금의 그대로와 앞으로의 그대로에서 충분하게 만족할 수 있는 상태와 또 대상을 내 마음에 맞춰서 바꿔버리려고 안달을 내는 상태의 두가지로 나눌수가 있잖아

혹은 더 마음에 드는걸 구하려고 헤매거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서 슬프거나

달리 말한다면 전자의 방식은 좋아하고 원함에 있어서 나의 욕심을 상대방의 모습에 맞추려고 하는 쪽이고 뒤엣것들은 오브제가 나에게 맞춰주도록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이 후자의 과정중 어느때 어딘가에서 아픔이 생겨났고,

그것이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라서 참아넘긴다면 좀 나중에, 그렇지 않다면 지금당장롸잇나우 일상의 긴급한 비극이 활성화된다

할퀸자는 말이 없고, 상처입은 누군가가 살아남았다면 훗날 자기몸에 앉은 날카로운 흉터로 순결한 다른이와 아픔을 나누리라

그리고 반대쪽, 앞편에 서있는 섬세한 사람들.

아마 그들 모두는 안식이나 구원이나 행복이나 뭐 그런 예쁜것들이 정말로 어딘가에 실재한다면 그 장소가 다름아닌 자기의 안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일방적인 목마름이 더 큰 갈증을 불러오게 마련이라는 이치와, 드러난 표상으로써 미루어 만족하다가 십중십 거기에 중독되어 그 관계가 유지되는 짧은 기간의 예정된 끝남이 일어나버리면 밀린 이자가 한방에 몰아치듯 더 크게 괴로워지니 그 뒷편 깊은데의 본질적인 무엇을 느낄 수 있게 되는것이 승부의 관건이라는 사실도 파악하고 있을것이고, 무엇보다, 비슷한 다른것에게 대신 보상받으려는 시도조차 똑부러지는 해법이 될수가 없음도 익히 알고들 있을것 같다

바랬던 것은 확률적으로 어그러지는 경우가 더 많고, 그에 상심으로 뒤흔들리며 혼자 아프다 말면 다행이지만 그보다는 생각나는 뭐라도 동원해서 마무리지으려 하다가 주변의 죄없는 여럿까지 같이 복잡해지는게 뻔하니 그러지 말자고 하더라

그들은 가능하다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게 분별을 두지 말고 모두다 동일하게 좋(아하)자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쉽게쉽게 떠벌이고 다니며, 그 다음에는 혹시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서 자청해서 휩쓸려 분노하지 않을 부동심을 쌓아 스스로를 보호하라고 말한다

또한 그럴수 있기 위해서는 보다 더 선하고 민감한, 활짝 웃으며 열려있는 마음의 고요를 유지해서 쉬지않고 몰아치는 타락과 남용의 유혹을 분별하여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고도 했었다

그렇구나

공감각을 틀어막을게 아니라 부동심이 필요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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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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